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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2 - 하이테크 저수지 청제 지금도 불가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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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부 박철희
PCH@tbc.co.kr
2023년 12월 27일

[앵커]
삼국시대 이후 천 5백 년째 쓰고 있는 저수지,
영천 청제를 조명하는 연속 기획 두번째 순섭니다.

나라의 흥망이 농업에 달렸던 시기, 청제 축조에 신라 첨단 기술이 총동원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박철희 기잡니다.

[기자]
장마를 만난 듯 며칠째 영천에 쏟아진 겨울비,

물넘이로 못물이 세차게 흘러내립니다.

아래쪽 들녘 곳곳으로 뻗은 수로들,

지금은 콘크리트지만 1912년 지적도에 표시된 수로에 푸른 색을 덧칠해 보니 상당 부분이
옛 수로 자리와 겹칩니다.

[CG 시작]
세종문화재연구원이 지적도와 1954년 항공사진을 분석한 결과 북쪽과 중앙, 남쪽에 각각 중심 수로를 배치한 뒤 10여 개 부속 수로를 연결해
최대 1.4킬로미터 떨어진 들녘 구석구석까지 물을 댔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리 설계를 한 듯 정연한 배열입니다. [CG 끝]

물을 공급받던 이른바 몽리지는 105만 제곱미터 정도, 1912년에서 1954년 사이 큰 변화가 없었는데
연구진은 신라 때 이런 규모를 갖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진성섭 / 세종문화재연구원 부원장]
"32만 평(105만 m2)에 대한 관개수로 공사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됐을텐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그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처음 청제비 만들 때(536년) 7천 명, 798년 수리할 때 1만 4천 명이 동원됐다는 어마어마한 (공사의 결과로 보입니다.)”

정밀지표조사에서도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북쪽 수로의 경사도는 0.18도, 남쪽은
0.35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공급 면적을 극대화한 건데 특히 북쪽은 구릉 사면까지 깎아 기울기를 확보한 고난도 기술이 확인됐습니다.

[진성섭 / 세종문화재연구원 부원장]
“(지금은) GPS라든지 이런 측량기구가 있는데 그때는 오로지 사람의 수작업으로 손과 괭이, 삽 이런 걸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0.18도로 꾸준하게 1.2km를 수로로 만들었다? 이건 굉장히 불가사의하다...”

고대 저수지의 진화 과정도 알 수 있습니다.

[CG]
536년 청제비 병진명과 578년 대구의 무술명 오작비에는 저수지를 둑 오(塢) 자로 표기했지만 798년 청제비 정원명에는 청제,
그러니까 둑 제(堤)로 바뀝니다.

[CG 시작]
오는 계곡 한쪽을 터 물을 흘러보내는 둑을 가리키지만 제는 계곡을 완전히 막은 뒤 목통을 통해 필요할 때 배수하는 방식으로 2백 년 간의 기술 진보를 반영합니다.

특히 청제비 정원명에는 배굴리를 수리했다고 나오는데 배굴리는 지금도 영천에서 쓰는 목통을 뜻하는 사투리 '빼굴리’를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CG 끝]

청제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빼굴리를 썼는데
인근 괴연저수지에서 발견된 80년 전 목통에서
형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기술이 신라와 영천에 맞게 진화하고 정착한 겁니다.

[김재홍 /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당대에는 물이 넘쳐서 흐르고 둑이 터져버리는데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고 그 기술을 자신들이 달성했다는 걸 중요하게 여겨 (청제비에) 기록한 겁니다. 신라인들은 자부심을 가졌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 있었고...”

[스탠딩]
"농업이 세상의 중심이던 시절, 당대 첨단기술을 총동원했던 영천 청제, 조사가 본격화되면
천5백 년을 버텨온 비밀이 하나둘 벗겨질 것으로 보입니다. TBC 박철흽니다."
(영상취재 이상호 김도윤 CG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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