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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이야기 - 불굴의 독립투사 '장진홍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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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 김낙성
musum71@tbc.co.kr
2019년 08월 16일

[앵커]

우리동네 항일이야기 순섭니다.

오늘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장진홍 의사를 김낙성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27년 10월 18일 오전.

대구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앞 길에서
폭탄 3개가 잇따라 터졌습니다.

당시 엄청난 폭발로
은행 창문 70여 개가 모두 부서지고
파편은 약 4백 미터 떨어진
대구역 앞까지 날아갔습니다.

이 의거의 주인공은 바로 장진홍 의사.

S.T> 92년 전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현장에는 당시의 의거를 알려주는
표지석 하나 없습니다.

1895년 6월 6일
경북 칠곡군 인동면에서 태어난
장진홍의사는 조선보병대를 거쳐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무장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다시 국내로 돌아온 장 의사는
1927년 6월 폭탄을 제조해
경북도청과 경북경찰부, 형무소 등에
투척하려고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넉달 뒤 폭탄을 조선은행 대구지점과 경북도청 등
4곳에 배달을 했지만 일본인 직원에게 발각돼
폭탄은 건물 앞 공터로 옮겨진 뒤 폭발합니다.

INT> 정만진 /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자문위원
" (장진홍 의사의 의거는) 단순한 사회운동을 하는 개념이 아니고 독립 전쟁을 하는 개념이었습니다. 너희들이(일제가) 불법적으로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강점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일제는 폭탄제조와 출처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대신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이육사 등 8명을 진범으로 꾸며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장진홍 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경시청 폭파를 준비하던 중 붙잡혀
1929년 대구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취조 과정에서도
불굴의 기개와 항일의지를 보여주고
재판정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습니다.

최종 사형이 확정된 장진홍 의사는
1930년 6월 5일 일제에 의한
치욕스런 죽음보다 자결을 택하고
순국했습니다.

장진홍 의사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구형무소 재소자 천3백여 명은
단식투쟁을 하며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INT> 이성우 교수 /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재판과정에서도 돌과 의자를 일제 재판장에게
던지시려고도 하죠. 투옥 중에 자결 순국으로
일제에 대한 항일과 독립의 뜻을 전달하신
분입니다. 장진홍 의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셨던 분들이
있었다 라는 것을 대구.경북 분들도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클로징> 이곳 칠곡군 왜관읍에는
장진홍 의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20년대 후반 경북지역
항일 의열투쟁의 큰 불꽃으로 살다 간
장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TBC 김낙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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