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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성장 배경은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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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부 정병훈

2020년 01월 17일

최근 국보 138호 고령금관이
고령 지산동 45호 대가야 고분에서
도굴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고 전해드렸는데요.

고령의 대가야가
6가야 가운데 최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금을 대량으로 생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졍병훈 기자가 보도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야사 재조명을 위해 열고 있는 특별전
'가야본성 칼과 현'의 전시유물 중 금제품은 대부분이 대가야 유물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령금관을 비롯해 다수의 금귀걸이는
일본이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되었더라도 대부분 대가야에서 만들어 나누어 주거나 수출한 것입니다.

금귀걸이만 250여점에 이르고
대가야왕이 주변국에 나누어 주었던
금동제 용봉문 환두대도도 50점에 이를 정도로 대가야는 황금의 나라였다는 지적입니다.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광산을 개발하고 그것을 채광해서 황금제품을 만들어서 일본열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수출하는 그것이 바로 대가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가야가 이처럼 황금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500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금을 채굴했을 정도로 많은 금이 생산되었고, 지금도 운수면 일대에는 곳곳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신종환/ 대가야박물관장]
"대가야시대 아마 금 광맥이 노두광산으로 드러난 부분을 지표에서부터 채굴을 해서 금을 채광하고 또는 은을 채광하고 이것들이 유물의 제작에 쓰인 것이 아닌가 이렇게 추정이 됩니다."

대가야 당시의 노두광산 뿐만 아니라
일제 때도 주야간 600명을 동원해
수 킬로미터를 채굴해 엄청난 양의 금을 캐냈고 불과 20-30년 전까지도 채굴이 이뤄졌습니다.

[윤종립/ 운수면발전협의회 고문]
"1500년 전 가야시대로 추정되는 노천금광이 5곳 정도 되고 조선시대 일제시대로 추정되는 곳이 3군데 정도 됩니다."

고령군은 금관, 금귀걸이, 환두대도로 대변되는 대가야 황금문화의 밑거름이 된
운수면 일대 금광에 대해 고고학적 조사와 함께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예정인데,
발굴조사가 이뤄지면 대가야 당시 금 생산 유적들도 새롭게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tbc 정병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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